취업 후 첫 해는 참 바쁘게 보냈었다.  외국에서의 첫 직장생활이어서 그랬는지 긴장도 많이 했었다.


당시 사수가 Bacula라고 하는 네트워크 백업 소프트웨어의 교육을 보내줘서 뉴저지에 있는 모 호텔에서 3박 4일간 교육을 받던 중, 뭐 그래도 이메일도 좀 확인하고 해야할 일이 있으면 해야할 것 같단 생각에 일을 좀 하니까 당시 사수 왈,


"휴가를 가던 교육을 가던, 사무실을 벗어나면 일은 하지 마라.  사무실에서 해야할 일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한테 맡기고, 너는 거기서 교육만 잘 받고오면 된다"


나도 이 말을 듣고 배워서, 내 사수가 휴가를 가면 절대로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도, 나나 내 직장동료들이나, 거의 천재지변급 사태가 터지지 않는 이상 휴가간 사람한테는 연락을 하지않는게 기본적인 예의이고 상식이다.


말 나온김에 당시 내 사수였던 사람에 대해서 얘길 좀 해보자면,

독일 사람이었는데 고등학교를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왔던터라 영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했고, 독일에서 전기전자공학 학사/석사를 했고,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전산학 박사를 했고, 지금까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고 느꼈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다혈질이었고, 독일사람답게 굉장히 직설적이었으며, geeky/nerdy했고, 애플과 애플 제품을 너무나도 혐오했으며, 자기 고향 독일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베트남계 독일인이었고, 뭔가 불합리한 일에는 열변을 토해가며 불만을 내쏟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은 미란티스라고 하는 세계 굴지의 오픈스택 회사에서 무려 클라우드 디렉터라는 직책을 맡고있는 정말 대단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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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후 몇 주 지나지 않아서 당시 내 사수가 프로젝트를 줬다.  SNMP라는 프로토콜이 뭔지 이해하고, 그걸로 모든 서버를 모니터링할 수 있게끔 세팅을 하라는 것.  기한은 대략 2주를 줬다.


뭐, 한국식으로 생각해서 빨리 끝내야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한 1주일만에 끝내버렸는데, 당시 사수 왈,


"나는 너한테 빨리 끝내길 원한게 아니다.  니가 이게 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니가 하려는 일이 뭔지 정확히 알면서 하길 원하는 거다.  앞으로 프로젝트할 때는 빨리 하려고 하지 마라"


근데 뭐 사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군대에 직장생활까지 하다온 나로서는, 아무리 그렇게 얘기해도 무조건 빨리 끝내야한다는 강박관념만은 못떨쳐내겠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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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는 출근시간 8시에 퇴근시간 5시로 거의 정해져있다.  다른 곳보다는 1시간 빨리 시작해서 1시간 빨리 끝나는데, 지각을 했다면 지각한 시간만큼 일을 더 하면 된다라고 하는 일종의 사회적인 통념이 있다.  예를 들어, 8시 30분에 출근했다면, 5시 30분에 퇴근하면 괜찮단 얘기.


첫 출근해서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어느날 하루는 지인과 함께 저녁 약속이 잡혀있어서 5시에 퇴근을 해야만 하는 날이었는데 그날 8시 30분에 출근을 했다.  퇴근하기 직전에 30분 먼저 가도 되냐고 사수한테 얘길해야하는데, 한국식으로 이걸 얘기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정말이지 한 30분은 고민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약속은 잡혀있었으니 말은 해야해서 용기를 내서, 딱 5시가 됐을 때 같이 근무하던 내 사수에게 "내가 오늘 일이 있어서 지금 가야될 거 같은데, 가도 될까?" 하고 물으니,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굉장히 이상한 표정으로 날 보면서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니가 가고싶으면 가는 거지, 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지?".


이런 일을 몇 번 겪은 뒤로는, 이러한 것을 물어보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됐다.  이후로는 너무 편해져서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됐다.


나: 야, 나 내일 모레 못나온다

사수: 어 그래?  뭐 무슨 심각한 일 있는 건 아니지?

나: 별 일 아냐.  걍 이러이러한 일이 좀 생겨서 어딜 좀 가야되는데 못나올 거 같아.

사수: 그날 뭐 특별한 거 없지?

나: 없어

사수: 오케


적는 김에 좀 더 적자면, 위의 에피소드로 봤을 때 내가 너무 직장생활을 날로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내 사수는 더 했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더니,


사수: 난데, 지금 출근 중이야?

나: 어 거의 다 왔어

사수: 오늘 우리집 애들 봐주는 베이비시터가 아무 얘기없이 안나와서, 오늘은 일 못나갈 것 같다.  특별한 일 없지?

나: 없어

사수: 그래 내일 봐.


이 정도는 그래도 애 때문에 그런 거니까 이해해줄만한데, 어떤 날은 사무실에서 일하다 한 3시쯤 되더니, "나 가야겠어.  내일 봐" 그러더니 휙 나가버렸다.



직장생활 참 편하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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