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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 외 2010. 5. 25. 21:19


오늘 우연히 아주 놀라운 블로그를 발견했다.

예전에 아버지가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의 자료를 갖고있는 블로그가 있었던 거다...


한때 구글에서 찾으면 뭔가 나올까 싶어서 (아무래도 연예인이셨으니) 구글링을 해봤는데 아버지가 쓰셨던 예명이 검색으로는 도저히 자료를 찾을 수가 없는 정도였고 그래서 결국 포기했었는데 이렇게 하나 찾으니까 무척 반갑다고나 해야할까...

울 아버지는 MBC 코미디언 공채 2기 출신이다. 위키백과에는 안적혀있지만 "청춘만만세", "웃으면 복이와요" 등에 출연하셨었고 당시엔 꽤 유명했었다. 신문/잡지에서 인터뷰도 했었고, 미혼일 때는 결혼은 언제할꺼냐 류의 흔한 연예란에도 가끔 나오셨었다. 그에 관련된 신문/잡지자료는 아직도 집에 보관 중이다.  수많은 유명 코미디언들과 아는 사이었으며, 어릴적 기억에 코미디언 구봉서 씨의 팔순(인가 칠순인가) 잔치에서 사회도 봤었고, 개그맨 엄용수, 강석, 이용식, 김병조 등등과는 매일 같이 자고먹고한 사이였다고 한다.  내 동생은 이름이 두 개인데, 하나는 집에서 식구들끼리만 쓰는 이름이 있고, 다른 하나는 법적으로 등록된 이름이 있는데, 집에서 쓰는 이름을 개그맨 이용식 씨께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 친구들이나 내 동생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는 사람은 그 이름을 안다.


보통 코미디언/개그맨 아빠들은 무뚝뚝하고 집에서 하나도 안웃긴다는데, 울 아버지는 재밌었다. 어릴 때 나랑 동생한테 늘 최고였고 (상대적으로 어머니가 악역을 맡으셨다), 집에 놀러온 친구들한테도 용돈을 쥐어주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PD랑 싸웠고 그 과정에서 PD 이빨 2개를 부러뜨리셨단다. 그후로 인생의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하신거다. 연예인이 할 줄 아는 게 뭐 있겠나. 밤무대 전전하면서 타 방송사 엑스트라 출연하시고, 3류영화 조연으로 나오시면서 생활하셨는데 사실 그게 먹고살기위한 수단이었지, 본인의 꿈이나 어떤 목표가 있어서 하신 건 아니었다.


어찌됐든, 그것으로 인해 우리집은 참 어렵게 살았고 돈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참 많았다. 지금도 없진 않다. 어릴 때 보고자란 그런 경험때문에 연예인은 정말 하지말아야할 직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라왔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연예인 하게 생긴 외모는 절대로 아니다.


98년 IMF터지고 바로 다음달인 1월에 악성폐렴으로 돌아가셨다.

어느 행사장에서 공연을 하고 돌아오셨는데 얼굴에 분장/화장을 하신 상태에 땀에 쩔은 상태이니 샤워를 안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 마침 보일러가 고장나있는 상태였다. 결국 12월 한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하셨는데 그게 원인이 되서 돌아가시게 된거다. 그때 당시에는 밤 11시 12시에 갈 수 있는 목욕탕이나 그런 곳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실은 울 아버지는 결핵과 천식이란 병을 평생 달고사셨다. 계단을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차서 쉬었다 가야하고, 매일같이 약봉투를 갖고다니며 약을 드셔야했다. 그런 분이 몸으로 뛰어야하는 직업인 코미디언을 하셨으니 얼마나 힘들셨을런지는 나도 상상이 안간다.

원래 결핵은, 잘먹고 잘쉬면 완치가 되는 병이다. 그런데 잘 먹고 잘 쉬려면 일을 그만둬야하는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 입장에서 일을 그만둘 수가 없으니 약에 의지하면서 평생을 사신 거다.


암튼 그 샤워 이후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좀처럼 퇴원을 안시켜주는거다. 그러다가 큰 병원으로 옮겨야한다는 주치의 말에 난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이라고 확신 아닌 확신을 하게됐다. 사실 곁에서 결핵과 천식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보고자란 아들이, 그런 상황에서 그런 확신을 하는 게 무리는 아니겠지. 난 그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내 동생 친구들은 (여동생이라 여자들이다) 나보고 매정하니 어쩌니하고 손가락질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남자니까 그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한 애들도 있었단다. 뭐 암튼 그랬다. 그날 엄청 울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심지어는 장례식장에서도, 화장터에서 화장할 때에도, 유골가루 뿌릴 때에도... (당시 할아버지가 살아계셨기 때문에 화장을 했다)


인하대 병원으로 옮기기 전부터 호흡기를 착용했는데, 그 호흡기에는 수면제가 들어있어서 계속 잠만 주무셨다. 게다가 그 호흡기는 법적으로 20일인가 이상을 착용할 수 없다고 한다. 진단병명이 악성폐렴이었고 호흡을 하면 폐에서 산소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아주 저조한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호흡기를 떼는 순간 돌아가시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다행스러운 건 그래도 고통없이 주무시다 돌아가셨단 거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쉬운 게,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계실 때 대화를 몇마디 못나눠봤다는 거다. 수면제 들은 호흡기만 착용하고 계셨으니 말을 하고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호흡기를 중간에 딱 한 번 떼셨는데, 그때 날 불러서 누구누구한테 돈 50만원 받을 거 있으니까 그거 잊지말고 꼭 받아라. 라는 말씀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식구들을 위해서 그 작은 돈이라도 잊지않으셨던 거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호흡기 착용하고 며칠 안있어서 호흡기를 떼게 됐는데 그때 당시 울 아버지가 엄청 난동(?)을 부리셨다고 한다. 내가 왜 호흡기를 착용해야하는지, 내가 왜 여기 입원해있어야하는지, 빨리 날 내보내달라고 그러셨단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데, 아마도 그때 본인이 돌아가실 것을 예견하셨던 것 같다.

암튼, 그 50만원 잊지말라는 그 말을 들은 이후로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다른사람에게 있어서, "우리 걱정하지 마세요. 잘 살께요"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자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난 그말 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게 아쉬웠었다.


돌아가신 이후 몇년의 세월이 흐르고 훗날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다. 만약 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계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어머니랑 나랑 똑같이 생각했던 건, 아마 지금보다 더 못살았을 거다. 라는 결론이었다. 아버지한테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기보단, 연예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는 아주 무능력한 존재라는 점인 거다. 기술도, 할 줄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털이다. 적어도 울 아버진 그랬다. 게다가 돌아가시면서 빚까지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 빚은 아직도 남아있다. 2배로 커진 상태로.


군대 제대 후 이것저것 알바를 하다가 결국 새마을금고에 입사를 했고 거기서 3년 동안 경력을 쌓았다. 그 와중에 결혼을 했고 그후 여기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졸업한뒤 지금은 하와이 주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내 동생은, 한국 최고의 무역회사라고 불리는 "세아상역"에서 일하고 있다가 출산 후에는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다. 고생하신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벌써 십수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그냥 덤덤한 편이지만, 막상 이렇게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 몇장으로인해 어릴적 과거의 일이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빨리감듯 다시 머리 속에 전부 스쳐지나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남은 삶을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아버지께의 효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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